프랑스
국명[편집]
"프랑스"라는 이름은 라틴어 Francia로부터 유래하였다. 글자 뜻대로 하면 "프랑크의 땅"을 의미한다. 한 이론에 따르면, 고대 게르만어에서 프랑크는 노예처럼 일하는 것에 반대되는 "자유로운" 이란 뜻이다. 이 말은 여전히 프랑스에서 "프랑"(franc)이란 단어로 남아있으며, 2000년대에 유로가 사용되기 전까지 사용된 프랑스 통화로도 쓰였다.
중화권과 베트남에서는 법국(法國)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며 발음은 파궈(중국어 보통화), 팝꿕(광동화), 팝(베트남어)으로 각기 다르다. 한국어권에서도 쓰였으나, 최근엔 거의 쓰이지 않는다. 종종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의 일본식 표현인 불란서(佛蘭西)로 불리기도 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현대 일본에서는 후란스(フランス)라고 표기된다.
역사[편집]
근대 프랑스의 경계는 대략 고대 골족[3] 의 영역과 같다. 기원전 10세기 이래 켈트인이 거주한 서구지역을 로마인들이 갈리아라 불렀다. 기원전 7세기경까지는 도나우 지방에서 이동해 온 켈트족이 갈리아 지방에 씨족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다. 기원전 1세기 무렵의 갈리아는 인적 결합체로서의 전사단인 몇 십 개의 키비타스(civitas)라고 하는 정치상의 단위로 나뉘어 있었다.[4] 부족 내부에는 기사 및 성직자 등의 지배층과 무장능력을 지닌 일반 자유민 외에 노예가 있었으며, 목축과 원시적인 쟁기를 사용하는 농경이 이루어졌다.
고대 로마제국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끈 군대가 기원전 1세기 경에 골족을 정복하였다. 폼페이우스 장군, 대부호 크라수스와 야심 많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제1차 삼두 정치 시대가 열린 로마는 그 정복의 칼끝을 유럽의 평원 쪽으로 돌리게 되었다. 카이사르는 알프스 산맥 너머에 있는 골 지역을 "로마화"하려고 하였다. 기원전 52년 켈트 족 연합군의 최고지휘자 웨르킨게토릭스는 카이사르의 발 밑에 그만 무릎을 꿇게 되었다. 기원전 51년에 카이사르는 전(全)갈리아를 평정하고 로마의 속주(屬州)로 삼았다.[5] 이로써 번영 일로의 "팍스 로마나" 시대의 영역은 라인 강 지역까지 미치게 되었다.[6] 웨르킨게토릭스가 카이사르에게 참패한 후, 라틴 어가 켈트 족의 언어를 대체하였고, 골인은 선진 로마의 풍습을 모방하였다. 소위 "문명인"과 "야만인"이라는 이분법의 잣대를 지닌 거만한 정복자들에게 골족은 영락없는 "야만인"이었다. 골인들은 독특하고 공통된 문화 자산을 소지하였으나, 부족들은 경쟁과 분열된 상태에 있었다.[6]
기독교(로마 가톨릭)는 기원후 2-3세기 무렵에 처음으로 전파되기 시작하였고, 4-5세기 무렵에는 견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라틴계 교부인 성 제롬은 골 지역이 유일하게 "이교로부터 자유로운" 곳이라고 기록했다.
기원후 4세기에 이르면 골족 영역의 동쪽 경계인 라인강 너머에서 게르만 부족들이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라인강을 따라 남하하였고, 주로 프랑크 족이었던 그들은 5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골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7] 이때 갈로로마 문화가 무너지고 암흑기에 접어든 것으로 얘기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가톨릭"의 영향으로 문화의 연속성은 유지되었다.[7]
프랑크족은 로마제국이 무너진 이후 유럽 곳곳으로 밀려든 게르만 정복자 중에서 처음으로 니케아 공의회에서 그리스도론(기독론)에 대한 교의차이로 이단으로 단죄된 아리우스주의가 아니라, 로마 가톨릭 교회로 개종한 첫 번째 부족이었는데, 이는 그들의 왕인 클로비스 1세가 498년에 개종하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프랑스는 "교회의 장녀"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La fille ainée de l’Église). 클로비스 1세는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메로빙거 왕조를 수립했다.
카롤링거 제국은 샤를마뉴 대제(카를:독일어 ,샤를:불어 ,카롤루스:라틴어) 시대에 들어가 크게 번영했다. 하지만 베르됭 조약 (843년)을 시작으로 동 프랑크(독일), 중 프랑크(이탈리아), 서 프랑크(프랑스)로 분리되기 시작했다.[5] 서 프랑크의 영역은 대략 현대 프랑스의 것과 비슷하며 현대 프랑스의 선조라고 할 수 있다. 카롤링거 왕조는 파리의 백작이자 프랑스의 공작인 위그 카페가 왕위에 오른 987년까지 프랑스를 통치했다. 그의 후손인 카페 왕조, 발루아 왕조, 부르봉 왕조는 계속되는 전쟁과 왕조의 유산을 통해서 꾸준하게 나라를 통합하였다.
그 후, 노르만의 침입, 이슬람의 침입을 겪는 동안 십자군이나 고딕 건축으로 대표되는 중세 봉건사회가 성립되었다. 오늘날 프랑스 남부에 해당하는 옥시타니아 지방의 이단 종파인 카타리파를 제거하기 위한 알비 십자군은, 1209년에 시작되었다. 십자군 원정의 결과로 카타리파가 제거되고 남부 프랑스의 독립이 좌절되었다.[8] 1337년에는 흑사병이 처음으로 유행하기 시작하였다.[9] 영국과 프랑스는 백년 전쟁에 돌입하였다.[10] 백년전쟁 초기에는 영국군이 우세했지만 잔다르크의 등장 및 프랑스군의 반격으로 이 전쟁은 프랑스의 승리로 끝났다.
이후 프랑스의 종교 전쟁 (1562–98) 중에는 매우 유명한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1572년 수 천명의 위그노들이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 사건에 휘말려 살해되었다.[11] 지리상의 발견, 종교개혁과 그에 따르는 분쟁을 거쳐 중앙집권이 거의 확립되었고, 절대 왕정은 17세기 루이 14세의 통치 기간에 그 정점에 달했다. 이 시기에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많은 수의 인구를 보유했으며, 정치, 경제, 문화 분야에 있어 유럽 전체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시기부터 프랑스어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국제 외교 무대에서 주요 공용어 중 하나가 되었다. 또한 이 무렵에는 데카르트의 이론을 비롯한 다양한 철학 사상들이 성립되었다. 계몽주의도 이 시기에 발달하였다.
왕정에서 공화정으로[편집]

프랑스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왕정 체제였고, 왕정은 1789년 7월 14일에 성직자와 귀족 계급을 무너뜨리려는 목적하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 기간 중 바스티유 감옥 습격 이후에 즉시 무너진 것이 아니었고, 1792년 9월 제1공화정이 들어설 때까지 유지되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등장하여, 국민의식과 인권사상을 각국에 보급했다. 그의 실각 후, 부르봉 왕정복고와 혁명이 되풀이되는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고, 루이 보나파르트의 제2제정, 7월 왕정, 파리 코뮌의 뒤를 이어 프랑스 제3공화국이 성립되었는데 이 체제 밑에서 세계 대전을 경험했다. 그리고 나치 독일 점령 하의 레지스탕스 등 혼란의 시대를 거쳐 프랑스 제4공화국의 성립을 보았다. 그러나 많은 식민지가 독립하여 정치적과 경제적으로 약해져, 1958년 드골이 지도하는 프랑스 제5공화국의 시대로 들어갔다.[5] 그러나 1968년 드골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 68혁명이 일어나 드골이 물러나고 퐁피두가 집권하게 된다.
프랑스의 자연 환경[편집]
1. 위치 프랑스의 국토는 북위 42도~ 북위 54도에 위치하고있으며, 유럽 대륙 서단의 지협부를 차지하고 전체 면적은 55만 1,695km2로서, 러시아, 우크라이나에 이어 유럽에서 세 번째로 큰 나라이다. 전체적으로는 대각선이 1,000km인 6각형에 가까운 모양을 갖추고 있다. 서쪽으로는 대서양이, 남쪽으로는 지중해, 북쪽으로는 북해와 접해 있다. 프랑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로는 동쪽은 이탈리아와 스위스, 독일, 북동쪽은 룩셈부르크와 벨기에, 남쪽은 스페인, 남서쪽으로는 안도라, 남동쪽으로는 모나코가 있다. 또한 대륙을 벗어나 북서쪽으로 영국 해협을 사이에 두고 영국과 마주하고 있다. 이 뛰어난 교통상의 위치로 해서 유럽 문명의 십자로라는 말을 들어 왔고 항상 그 중심이 되어 있었다. 해외 영토는 브라질과 수리남, 네덜란드의 해외 영토인 신트마르턴과 국경을 접한다.
2. 지형 북동부의 알자스 지방과 남서부의 바스크 지방을 잇는 선을 경계로 남동부 지역은 높고 북서부 지역은 고도가 매우 낮은 평야나 대지, 또는 구릉지대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대체로 대서양으로 지형이 열려있다. 한편 남동부 지역에는 고도가 높고 기복이 큰 산지들이 집중되어 있는데 특히 300m 이상의 능선이 여러 곳에 분포하는 알프스 산맥과 피레네 산맥은 각각 이탈리아 및 스페인과 자연적인 국경을 이루고 있다.
오늘날의 지형은 알프스 조산운동과 헬시니아 조산운동에 의해 형성되었다. 전자는 알프스·피레네·쥐라 등의 험준한 습곡산지를 이루고, 후자는 중앙산지와 거기에서 북서쪽으로 뻗는 아르모리칸 산지 및 북동쪽으로 뻗는 보즈·아르덴느 산지를 형성했다. 이들 산지는 침식이 진행된 노년기의 지형을 나타내고 일반적으로 완만하다. 중앙산지의 북쪽에는 파리 분지, 남서쪽에는 아키텐 분지가 펼쳐지고 남동쪽은 알프스와의 사이에 손강, 로온강의 좁은 계곡이 뻗친다. 아르모리칸 산지는 노르망디 반도와 브레타뉴 반도에 걸쳐 200m 내외의 완만한 구릉을 이루고 있으며 이들 산지의 사이를 르와르강·센강·가론강 등이 흐르고 있다.
3. 기후 남부 일부 지역은 지중해의 영향을 받으나 고위도이기때문에 춥고 서늘하다. 해안으로부터의 거리, 해발고도, 국지적 풍향에 따라 변화무쌍한 기후가 된다. 북쪽에서 남쪽까지, 동쪽에서 서쪽까지 다양한 기후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북부는 영국만큼이나 비가 자주 오나 남부는 비가 자주 오지 않는다. 1000m 이상의 산이 국토 면적의 50%를 점하는 유럽 제 1의 삼림국가이자, 유럽 제 1의 낙농국가이다. 피레네산맥일대와 알프스산맥일대는 겨울엔 매우 춥고 눈이 매우 자주 오며, 여름엔 건조하고 선선한 날씨가 이어진다. 프랑스는 아주 추운 나라로서 북부 일부지역은 한겨울에 영하 40℃ 정도까지 기온이 내려간다. 기후의 연교차는 크지 않고, 서남부의 피레네산간지방과 동남부의 알프스산간지방의 일교차는 20℃ 정도가 된다. 강수량은 산악부에서는 1600mm 전후이고, 내륙에서는 1200mm 전후이다.
정치[편집]
알제리 문제 등의 정치적 혼란을 수습한 드골장군은 1958년 10월 8일에, 대통령제를 골자로 하여 대통령에게 강대한 권한을 주는 헌법을 공포했다. 이 헌법에 바탕을 둔 제5공화국의 특색은 입법부에 대한 행정부의 우위에 있는데, 내각은 대통령이 임명하는 총리와 각료로서 구성된다. 초기 헌법에서 대통령의 임기는 7년이었으나, 2000년 국민투표를 통해 5년으로 단축하였다. 의회는 양원제로서, 하원에 해당하는 국민의회는 2회 투표, 소선거구제의 직접 · 보통선거로 선출되는 577명의 의원(임기 5년)으로 구성되며, 상원은 국민의회 및 지방의회 대표에 의한 간접선거로 구성된다(정수 319명, 임기 9년, 3년마다 1/3개선). 정당은 중도파의 신(新)공화국 연합을 비롯하여 전통적인 작은 당의 분립인데, 소선거구제로 인해 정국은 일단 안정을 보이고 있다. 드골 대통령의 EC를 기초로 하는 유럽의 단결을 꾀함과 동시에 타국에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입장에서 ‘위대한 프랑스’의 실현을 지향했다. 자유 진영에서는 최초로 중화인민공화국에 대사관을 개설했고, NATO의 군사기구 탈퇴, 독자적인 핵전력의 개발 등이 그 좋은 예이다.[12]
드골의 퇴진 후 1969년 9월 조르주 퐁피두 총리가 제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1974년 급서했으며, 1974년에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이 제3대 대통령에, 1981년 5월 사회당의 프랑수아 미테랑이 제21대 대통령에, 1995년에는 신 드골주의자 자크 시라크가 제22대 대통령에 취임했으며 2007년 5월에는 니콜라 사르코지가 제2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사르코지는 2012년 5월 6일 재선에서 패했고, 현재는 에마뉘엘 마크롱가 대통령 자리를 맡고 있다.